2022. 5. 14. 22:41ㆍ따뜻한 토론교육 봄호(제2호)/사는 이야기
말
서울토론모임 임윤지
“갑자기 손절을 하자고 하잖아요.” 우리 반 **이가 상담을 요청해왔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일명 ‘손절’이라고 불리는 관계 종료를 선언한 것이다. ++이의 ‘손절 선언’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이와 ‘손절’을 결심한 ++이 마음을 풀어내기 위한 상담 자리를 마련했다. 아이들의 마음 이야기를 들으려 몇 가지 질문을 하던 중 나는 마음이 쿵 내려앉는 말을 들었다. “어떤 마음으로 갑자기 **이와 손절을 결심하게 된 거야?” 내 질문에 ++이가 답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마음 맞지 않는 아이랑은 손절하라고 하셨잖아요.” ‘아이고’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이가 말한 이야기는 내가 얼마 전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 시간에 했던 말 중 하나였다. 친구 관계에서 지속해서 불협화음이 생기고, 서로 애써도 갈등이 줄어들지 않을 때는 잠시 거리를 두고 지켜보며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에게는 그 이야기가 마음 맞지 않는 친구와 ‘손절’ 하라는 의미로 들렸나 보다. 어쩌면 ++이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삶에 적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들에게 조언한 내용들이 다른 모양이 되어 아이 삶에 적용된다는 것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과 염려를 담아 건네었던 말들이 때론 무기처럼 쓰일 수도 있다는 것에서 이 일의 무거움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법정 스님의 유언이 떠오른다. 말빚은 말로써 지은 빚을 의미한다. 아마 스님은 이승에서 남긴 말과 글들을 업보와 허물로 여겨 유언에 그리 쓰셨으리라 생각한다. 법정 스님의 ‘말빚’과 결이 조금 다르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건네는 말과 글들 또한 때론 말빚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나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것들을 정답처럼 외치고, 가르치는 내 말들이 나의 첫 번째 말빚이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도망치기보다, 마주하고, 해결해라.”, “미운 사람을 미워만 하지 말고, 나 전달법으로 바라는 점을 전해라.”. 이런 도덕적인 이야기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 교실에서 전하지만, 내 삶에서조차 실천되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다. 나 자신도 지키지 않는 말들을 아이들에게 하고 나면, 자주 허전하고 씁쓸하다.
두 번째 말빚은 며칠 전 겪은 일처럼, 아이들에게 건네는 조언들이다. 내가 전하고자 했던 말의 의미가 타인에게 다르게 전해졌을 때는 언제나 당황스럽다. 그런데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내 이야기가 잘못 전해질 때는 더욱 당황스럽고 걱정된다. 내 이야기 전체의 맥락을 읽지 않고, 부분적인 이야기만 건져내어 듣거나, 아이들이 자기 경험 안에서 수정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그렇다. 모든 이야기를 매번 한 아이, 한 아이에게 맞춤식으로 전할 수 없다 보니 이런 일은 꾸준히 생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건넬 많은 조언과 충고들은 여러 번 제 방향을 잡지 못한 채로 전해질 것이다.
이 두 가지 말빚을 줄이려면, 말을 줄여야 한다. 말을 줄이지 못한다면 내가 하는 말에 가까운 사람이 되거나, 말이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말을 줄이는 것보다 더욱 많은 힘이 쓰이는 일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말을 줄여 말빚을 덜어내고 싶지만, 우리 직업이 ‘말’로 아이들을 만나기에 그러기 힘들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괴롭다. 때론 ‘침묵’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기도 하고, 온종일 말을 않고 싶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일들을 꿈꾸니 더욱 지친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아이들이 내게 행복을 주는 순간을 비타민 삼아 힘을 얻어 말과 삶이 같은 어른이 되어가거나, 내 이야기가 제 방향대로 전해지도록 애쓰는 수밖에. 내일도 비타민 같은 순간들을 찾아 교실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