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7. 22:53ㆍ따뜻한 토론교육 가을호(제1호)/교실 이야기
군포토론모임 김영훈
1. 아이들 글을 모으다.
아이들 글을 이전까지는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잘 쓴 내용이면 함께 나누고 칭찬하고 그런 정도. 그런데 올해는 기록한다. 아이들이 쓴 글, 그린 그림, 모두 남기고 싶다. 그래서 문집으로 엮어주고 싶다. 한해살이가 고스란히 담긴 한 권의 책을 담아내는 작업. 아이들의 글은 살아있다. 한비의 글은(사진) 나를 돌아보게 한다. 지내다 보면 꼭 교과서를 가지고 오지 않은 아이를 만난다. 그럴 때마다 '엄하게 타일러서 다음에는 그러지 않도록 해야 하나?', '일부러 놓고 온 것도 아니고, 다음에 꼭 가져오도록 부드럽게 말할까?' 고민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말하곤 하는데 한비에게는 여러 차례 부드럽게 말했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혼낼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 또 안 가지고 왔을 때도, 일주일째 가져오지 않았을 때도 "다음에는 꼭 가져오자." 얘기했다. 그리고 안 가져왔던 어느 날, 수행평가로 동네 사람들에게 감사 편지 쓰기 활동을 하는데 나에게 썼다.
"선생님은 화가 안 나시나요? 저는 화가 많이 나는데..."
이 문장을 한참 읽었다. 내 순간의 판단이 모여 아이에게 큰 영향을 주는구나.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현명하게 판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 글똥누기와 일기
요새 글똥누기 확인을 바쁘단 핑계로 소홀히 하고 있다. 그러자 재욱이가 "옛날엔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써줬었는데." 하며 혼잣말하는 것이다. 뜨끔해서 "선생님이 그렇게 써줄 때가 좋았어?" 하니 "네, 또 써주면 좋겠어요." 한다. 그래도 계속 정신이 없어서 못 읽다가 어제 청소하며 잘 쓰던 아이의 글을 펼쳤다가 놀랐다. 예전에 틈틈이 확인할 땐 정말 길고 세밀하게 잘 썼는데 그러지 못하니 굉장히 형식적인 글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띵했다. 태양을 받는 식물처럼 교사의 관심에 따라 살아나고 죽는 것이다. 일기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니 아이들도 잘 쓰지 않는다. 말로 늘 "오늘 일기 쓰세요. 지금 이 경험을 쓰세요." 하지만 확인하지 않으니 아이들은 쓰지 않는다. 난 그동안 습관만 붙여주면 스스로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다. 습관 붙이기는 어렵지만 붙인 습관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반성한다.
3. 미션 마니또
학급 회의에서 마니또를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1학기에도 했는데 그 기억이 무척 좋았나 보다. 다만 회의하며 정한 건 마니또로 뽑은 친구뿐만 아니라 뽑아준 친구에게도 편지를 주자는 것이다. 두 통의 편지를 써야 하기에 싫어할 것 같았으나 웬걸. 많은 아이가 둘 다 쓰기로 했다. 기대 안 하던 나도 괜히 기특해서 웃었다. 미션은 아이들과 정해 일주일 정도 하고 발표하는 날 편지를 쓰도록 했다. 읽어주면서 전해주려 했는데 여전히 부끄럽단다. ‘그래, 마니또에게만 전할 말이 있겠지.’ 싶어 자아 선언문을 활용했다. 그냥 편지만 틱 전해주면 감동도 재미도 떨어지니까. 결과는 무척 좋았다. 받은 편지와 자아 선언문은 일기장에 붙여 일기를 쓰도록 했다.

4. 온작품읽기와 ㅇㅇ이 이야기
2학기는 빨강 연필을 읽었다. 양이 제법 되는 소설이라 2학기 시작하고 내내 읽었다. 이야기가 몰입감 있기에 모두가 푹 빠져 읽었다. 처음엔 돌아가며 함께 읽다가 중반부 들어서는 모둠을 꾸려 모둠끼리 돌아가며 읽었고 끝부분의 4장은 내가 읽어주었다. 다 읽고 나서 소감을 글로 남겼다.
글을 읽다가 한 아이의 글에 한참을 빠져있었다. ㅇㅇ이는 요즘 학기 초에 포기한다고 했던 영어도 열심히 하고, 미술도, 음악도, 체육도 열심히 한다. ㅇㅇ이에게 칭찬을 자주 하는데 엊그제 내가 물었다.
"ㅇㅇ아, 너 학교에서 요즘 너무 열심히 해서 선생님이 아주 기특하게 생각하는데, 집에서 부모님께 자랑도 하니?"
"어... 집에서 이런 얘기는 잘 안 해요. 부끄러워서."
"그래? 그럼 내가 대신 전해야겠다." 하고는 연락드렸다. 요즘 아드님 학교생활 너무 훌륭하게 잘한다고. 칭찬 많이 해주시라고. 그런 다음 날 열심히 써온 일기, 그게 마지막 사진의 글이다. 읽고 있으니 '내가 어쩌다 전한 이야기가 아이에게 큰 영향을 주었구나, 하길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진작할 걸. 다른 애들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교사로 살면서 생각보다 바꿀 수 없는 게 많구나 하고, 한껏 무념무상으로 살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아이, 3월에 다시 태어난다고 꾹꾹 눌러쓴 그 아이다. 그 후 고비도 있었지만 아이도 노력하고, 나도 관심을 가지고, 집에서도 믿어주니 진짜로 다른 아이가 된 것처럼 변했다. 모두 바꿀 순 없어도, 하나라도, 바꿀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