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19. 21:06ㆍ따뜻한 토론교육 가을호(제3호)/사는 이야기
이제는 명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책 내용이 담겨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군포토론모임 김창태
대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이런 철학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하루 종일 숨돌릴 새도 없이 바빠 잠깐 쉬긴커녕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을 때나, 무언가 오랫동안 최선을 다해 준비했음에도 완전히 실패했을 때, 또는 수많은 사람이 허무하게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도 그렇지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룰루 밀러도 그랬나 봅니다. 어릴 때부터 생화학자인 아버지로부터 운명도, 신도, 내세도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들어온 그녀. ‘찾아온 혼돈에 뒤흔들리고, 내 손으로 직접 내 인생을 난파시킨 뒤 그 잔해를 다시 이어 붙여 보려 시도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 답을 한 남자에게서 찾습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 분류학자인 그는 어린 시절 형을 잃었고, 첫 번째 아내와 몇몇 아이들을 잃었으며, 자연 현상으로 인해 평생 연구한 어류 표본들을 대부분 잃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지요. 남은 표본들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지치지도 않는지 새로운 표본을 찾으러 떠나고, 두 번째 아내를 맞아 성공적인 가정을 꾸립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그에게 스탠퍼드 대학의 학장 자리와 수많은 상과 메달, 막대한 재산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긍정적 결과가 없는데도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들 수 있게 해주었던 힘 덕분이죠. 데이비드 스타 조던도 낙천성의 방패를 자랑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바라는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일하고 그런 다음 결과를 차분히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아가 나는 일단 일어난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마음 졸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읽으니 롤모델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성장소설 같았습니다. 자기계발서 같기도 했고요.
그런데 여기까지는 딱 이 책의 절반입니다. 그럼 나머지는? 마치 술술 풀려가는 일들을 보며 애써 무시한 불안감이 먹구름으로 변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듯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서 조금 다른 면을 하나둘 발견합니다. 그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평생 믿어온 자연 속 질서의 사다리에 따라 부적합하거나 열등한 개체는 번식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우생학을 열렬히 지지했지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동안 쌓아온 명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부적합한” 사람들을 불임화해야 한다며 이를 법으로 만들기 위해 연설을 하고 다녔습니다. 놀랍게도 미국 대부분 주에서 실제로 이런 우생학적 불임화 법안이 만들어졌고 실제로 많이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영문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강제로 수용소에 끌려가 불임 시술을 받았다고 해요. 여기까지 읽고 나니 마치 어두운 밤길 별처럼 빛나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룰루 밀러의 좌절이 여기까지도 느껴지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자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남는 세상일까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굳이 살아갈 이유가 있는 걸까요? 저자는 그 답을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찾습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수십 년 동안 외쳤던 바로 그 우생학적 불임화를 시행하는 수용소에 있던 메리, 같은 신세이면서도 메리를 보호해준 애나. 둘은 지금까지도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민들레가 잡초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약초, 누군가에게는 염료, 누군가에게는 소원을 비는 존재, 누군가에게는 짝짓기 장소가 되듯이 우리 인간들도 드넓은 세상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 있고 아주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지만 한편으로 누군가에게는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누군가에게는 웃음의 원천, 누군가에게는 삶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비과학적인 시각이라고 룰루 밀러는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조금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동안 꽤 많은 사람이 서로에게 외쳐온 목소리를 조금 더 명확하게 알아들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전태일이, 신부이자 의사였던 이태석이, 요한과 씨돌로도 불렸던 김용현이,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위험한 현장에서 누군가를 도운 이름 없는 이들이 우리에게 남긴 목소리이지요. 그들은 대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이해하긴 어려웠고 때로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그들은 우리가 모두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두가 그들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텐데요. 물론 세상은 여전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처럼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위하는 긍정적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 성공하고 잘 살아갑니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요. 지금도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지 않나요? 하지만 서로를 돕는 이들이 많은 사회와 자신만을 돕는 이들이 많은 사회 중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모두 같을 겁니다. 그저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고 외면하면 참 쉽겠지만 그래도 조금 어렵게 세상을 살아가 보자고 다짐해봅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누군가에게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요. 또 그 누군가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요.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니 서로를 돕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도록 노력해보고 싶어졌거든요.
아, 그래서 이 책 제목은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일까요? 사실 아직 뒷부분 내용이 더 남았지만, 저자가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제가 들은 목소리와 약간은 방향이 다른 것 같아 이 글에 담지 않았어요. 직접 읽어보시면 또 다른 발견을 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