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하기 참 싫은데

2022. 11. 19. 22:01따뜻한 토론교육 가을호(제3호)/사는 이야기

교사하기 참 싫은데

고양토론모임 곽노근

 

꾸역꾸역

실제로 그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겠지만, 그만두는 상상을 한다. 나에게 교사는 천직이 아니다. 나는 꾸역꾸역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처음 교단에 올랐을 때,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생각보다 너무 힘들다는 걸 알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드는 보람, 뿌듯함, 감동 따위를 느끼기보다는, 그냥 힘들었다. 물렁물렁한 나를 아이들은 물어뜯었고, 나는 어쩌지 못했다. 반은 엉망진창이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차별에 나는 무기력했다. 그 무기력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내가 가장 혐오했던 것들이 반 안에서, ‘순수한아이들의 이름으로 거행되었다.

물론 처음이라 너무 미숙했다. 교대에서 배운 건 과장 하나 안 보태서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맨몸으로 학교에 던져졌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내 부족함을 깨닫고 열심히 배우러 다녔다.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나 사명감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배우러 다녔다. 내 부족함과 미숙함은 내 학교생활을 너무 힘들게 했고, 괴롭게 했다. 숨을 좀 쉬고 싶어 배우러 다녔다. 정말 열심히 다녔다. 배우니 좀 나아졌고, 숨을 쉴 만큼은 되었다. 그러나 딱 그만큼이다. 숨을 쉴 정도.

숨을 쉴 정도가 되니 가끔 수업에 생기가 돌기도 했고, 따뜻한 순간도 찾아왔다. 왜 없었겠는가, 나를 설레게 하는. 뭉클하게 하는 아이들이.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어쩌다였고, 대부분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숨 막혔다. 여전히 배워가며 내가 편안하게 아이들과 살아갈 공간들을 넓혀 가고 있긴 했지만, 충분치 않았다. 넓어졌다 생각했는데, 다시 좁아졌다. 넓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행복하지가 않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야 그 무엇과 바꿀 수 없고, 이런 일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게 한편으로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온전히 기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런 내가 부끄럽다. 그러나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나 자신의 현재 상태가 행복하지 않은 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건대, 나는 행복하지 않다.

돈을 버는 것, 안정성 등등 외적인 것을 떠나서 교사라는 직업이 나에게 꼭 들어맞는 옷이 아닌 건 사실이다. 물론 이 세상에 직업을 가진 이들 중 자기 몸에 꼭 맞는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다들 맞춰 가는 것일 게다. 그런 걸 모르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 나는 필요 이상의 불평불만을 늘어놓겠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교사를 하면서 그렇게 즐겁게 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처음부터 엄청 교사가 하고 싶어 교대에 온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럼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뭘까. 역시나 돈을 얼마나 버는지, 얼마나 이름 있는 직업인지를 다 떠나서 말이다. 사실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뭔지,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지 않나. 그런데 나는 적어도 그렇지는 않다. 정확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면 엔돌핀이 솟고 의욕이 나는지 알고 있다.

꼭꼭 눌러 말하건대, 나는 책 읽고, 공부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한다. 책을 읽고 무언가 하나씩 알아갈 때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차오르는 걸 느낀다. 그리고 내가 알고 느낀 걸 글로, 나만의 문체로 차곡차곡 표현해 갈 때, 희열을 느낀다. 말하기 민망하지만 그렇다. 나는 그리 똑똑하지도, 아는 게 엄청 많지도, 지식 습득력이 엄청 빠르지도, 온종일 책에 빠져들 정도의 집중력이 있지도 않지만, 뭐 꼭 잘해야만 하는가. 나는 잘하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걸 얘기하는 중이다. 하루 종일 책 읽고, 강의 듣고, 글 쓰며 (살수만 있다면)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 수 없다는, 말하기조차 민망한 너무 뻔한 진실 앞에서, 내가 교사 때려치우고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이상한 행동을 할 거라 생각하는 이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생각보다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물론 솔직히 시뮬레이션을 심심풀이로 돌려는 봤다.

내 좋아하는 일과 가장 맞는 일은 굳이 찾자면 교수정도 될 테고, 또 다른 직업으로는 작가정도 될 것이다. 둘 다 너무 현실성이 없다. 그에 앞서 그럴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다. 나는 나름 메타인지가 발달했다고 믿기에, ‘망상을 하면서도 그게 망상임을 또렷이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수. 지금 나이 마흔에 교수가 되려고 시작한다면 글쎄, 아직 석사 학위 하나 없는 내가 그 아득한 시간을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작가. 책을 쓴 것 자체로 작가라고 할 수 있다면 민망하지만 나는 이미 작가다. 1쇄도 채 나가지 않은 책의 저자도 작가라고 쳐 준다면 말이다. ‘작가를 본업으로 해서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꿈에도 못 꿀 일이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그냥 읽고 생각하고 쓰고 싶을 뿐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그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생계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삶이 정말 행복한 삶이 아닐까? 나는 아니다, 그런 삶이.

 

노예

빨리 퇴직해 보는 것도 생각해 봤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연금은 300만 원 이상 나온다. (교사 유튜버 최주부를 검색해 보시라.) 연금개혁으로 연금 액수가 엄청 깎인 줄 알지만 다달이 받는 연금액 자체는 그렇지 않다. 정말 내가 탈 때도 300만 원 이상 나온다. 그런데 그건 정년까지 꽉꽉 만 65세까지 채웠을 때 일이다. 만약 만 55세에 명예퇴직을 한다면, 지금처럼 바로 연금이 나오지 않는다. 65세가 되어야만 연금을 탈 수 있다. 그러니까 일찍 퇴직하면 곧바로 생활비는 끊기게 되는 셈이다. 300만 원 이상 연금으로 받아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생각 하니 정년, 어떻게든 꽉꽉 채워야겠다고 다짐한다. 한때 생태주의자들의 자발적 가난이 멋있어 보였고, 그런 삶을 잠깐이나마 상상해보기도 했던 나는 어느새 돈의 노예가 되었다. 이래저래 행복하지 않다.

 

기여하는 삶

근래에 건강한 삶, 의미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무한의 자유를 느끼고 싶은 나의 욕망은 그것 자체로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의 개념을 파고 들어가면 애매해지고 힘들어진다. 중산층의 삶을 사는 나는(교사 부부는 최소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자체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누리는 이 부유함(물론 상대적인 부유함이다. 주관적으로는 항상 쪼들린다.)이 실은 누군가를 착취하고 얻어진 것은 아닌가. 예컨대 장애인 문제에 있어서, 빈곤의 문제에 있어서 나는 이렇게 무관심해도 되는 것인가. 그들이 그렇게 된 건 정말 그들 탓은 아닐 텐데(이 정도는 모두 동의해 주시리라 믿는다.) 그럼 누구 탓인가. 사회 시스템 탓이라고 책임을 떠넘기면 아주 속이 편하긴 한데, 그 사회 시스템에서 굳이 나누자면 나는 누리는 자가 아닌가. 개똥철학 나셨다. 누가 보면 내가 아주 돈 좀 있는 사람 같겠다.

그런 개똥철학을 이어가던 와중에 기여하는 삶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세상의 억압받는 자, 소외당하는 자들이 있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사회를 뒤집어엎는 변혁을 이루어 내는데 중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정말 조금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기부를 하든, 시간 날 때마다 봉사를 하든, 내 자족을 채우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에 기여하는 행위에 대해 멀리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하는 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만큼 세상에 기여하는 일은 없다. 더 구구절절 부연하지 않아도, 이것만큼은 너무나 또렷하고 명확했다. ‘기여하는 삶을 산다고 멀리서 일을 찾는, 예를 들어 연탄 나눔을 한다고 주말을 땀에 절어 보내는 행위는, 도리어 위선적이다. 아이들에게 더 힘을 쏟고 더 헌신하는 삶이 나를 더 건강하게 만들고 더 의미 있게 만들 테다.

 

우왕좌왕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고, 가르친다는 것이 내 몸에 꼭 맞는 옷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여전히 하고 있다. 내 안에서 이 두 가지 생각은 우왕좌왕, 정리되지 않은 채로 왔다 갔다 하고, 나를 미치게 만든다.